- 동양평화와 대한독립에 헌신

어머니가 지어 보낸 옷을 입고 있는 안중근.(사진제공=독립기념관)

 독립기념관(관장 이준식)은 국가보훈처, 광복회와 공동으로 독립운동가 안중근을 10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고 공훈을 기리는 전시회를 개최한다고 1일 밝혔다.

독립기념관에 따르면 안중근은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고, 아명은 응칠(應七)이다.

아버지가 천주교에 입교하면서 안중근도 아버지를 따라 세례를 받고 세례명을 도마(Thomas)로 했다.

안중근은 할아버지에게 조선역사와 유교경전을 배우며 민족의식을 길렀다.

또 유학자이면서 근대 신문물을 수용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개화적 사고도 지닐 수 있었다.
지난 1905년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해외로 나가 국권회복의 길을 모색하던 안중근은 국내로 돌아와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했다.

서우학회에 가입한 후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운영했으며, 지난 1907년 2월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자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를 조직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애국계몽운동을 통한 국권회복에 힘쓰던 그는 일제에 의한 광무황제 강제 퇴위와 대한제국 군대 해산 등을 보면서 국내 항일운동에 한계를 느껴 국외 독립전쟁에 참여하기로 결심하고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했다.

북간도를 거쳐 연해주에 도착한 안중근은 동의회 산하 의병부대의 우영장(右營將)을 맡아 지난 1908년 여름 두 차례의 국내진공작전을 이끌었다.

아울러 얀치헤(煙秋)에서 동지들과 동의단지회를 결성하고 조국 독립에 헌신할 것을 맹세했다.

그러던 중 초대 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지난 1909년 9월 만주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대한제국을 침략하고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로 결심했다.

 의거 준비를 마친 안중근은 10월 26일 하얼빈역에 도착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다.

러시아 헌병에 체포된 안중근은 뤼순(旅順)에 위치한 일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으로 송치돼 여섯 차례 재판을 받았다.

법정에서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의 15가지 죄를 지적하고,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적장 이토를 처단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일본 법원은 사형을 선고했다.

  안중근은 공소하지 않고 옥중에서 자신의 자서전인 ≪안응칠역사≫와 거사 이유를 담은 ≪동양평화론≫을 저술하다가 지난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뤼순감옥에서 사형 순국했다.

정부는 안중근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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