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경제 제재 등 여파로 항일정신 되새기는 방문객 증가 전망

윤봉길 의사가 1932년 4월 29일 거사 직전 상해 임시정부에서 찍은 결연한 모습./에이티엔뉴스 DB

74주년 광복절을 맞아 매헌 윤봉길 의사의 생애와 정신을 기리는 예산군 ‘충의사’가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올해는 광복절과 일본의 경제 제재로 인한 각계의 반발이 맞물려 윤 의사의 항일정신을 되새기려는 방문객이 급속히 늘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윤 의사는 순종 융희 2년인 1908년 6월 21일 덕산면 도중도 생가에서 윤황 공의 장남으로 태어나 15세 때는 뛰어난 학력으로 천재소리를 듣기도 했으며, 19세 때인 1926년 야학회와 독서회를 창설해 문맹퇴치에 힘썼고 1927년에는 농민독본을 집필해 농촌부흥운동과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압제를 목도한 윤 의사는 1930년 3월 6일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라는 비장한 유서를 남기고 망명길에 올라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해 홍구공원에서 천장절 상해사변 전승축하식장을 폭파하는 거사를 행했다.

이후 현장에서 일본군에 체포된 윤 의사는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일본 오사카 위수형무소에 수감됐으며, 같은 해 12월 19일 총살형을 받아 25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했다.

이 사건은 중국 등 세계에 알려졌고, 중국의 지도자 장제스는 “중국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고 격찬했다.
1962년 정부는 윤 의사에게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 중장을 추서했다.

이러한 윤 의사의 애국정신을 기리는 충의사는 덕산면 덕산온천로 183-5에 소재하고 있으며, 총 14만7802㎡에 4개 구역으로 나눠 있다.

본전지역은 윤 의사의 영정을 모신 사당과 충의문, 홍살문 등이 있고 기념관 지역은 윤봉길의사기념관, 어록탑, 사적기념비가 자리해 있다.

기념관에는 윤 의사의 유품이자 보물 제568호인 27종 51점이 전시돼 있고 윤 의사의 일대기를 요약한 매직 비젼 11대와 각종 영상, 디오라마를 제공하고 있으며 11경도실이 있다.

성장가지역은 윤 의사가 망명 전인 23세까지 거주하던 저한당과 의거 기념탑, 동상이 있고, 생가지역은 냇물이 흘러 명명한 도중도, 출생해 4세 때까지 살던 광현당과 야학을 공부하던 부흥원, 물레방아 등이 남아 있다.

한편, 충남문화재단이 기획한 윤 의사의 일대기로 기획한 팩션 뮤지컬인 ‘워치’로 제작돼 다음달 10일부터 15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 용에서 5차례 공연되며, 오는 10월 2일 예산에서 공연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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